성찬의 올바른 의미

한기승 목사

  오늘은 우리 교회가 성례주일로 지킵니다. 이 성례주일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나 자신)을 화해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감사함과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성찬에 관한 교리와 주장이 각기 달라서 성도들 혼동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성찬을 어떻게 이해해야 올바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배에 기본적으로 설교와 성만찬의 두 가지 근거위에 세워져 있었으나 중세이후 마 카톨릭교회의 예배는 성만찬 중심의 예배가 되었고,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 예배는 설교 중심의 예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로마 가톨릭교회가 성만찬을 중요시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화체설이란 신부가 떡과 포도주를 들고 기도하고나면 그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화체설의 주장은 다메섹 요한을 걸쳐 하이모 감독(Haime of Haiber stadt)에 의해서 그 교회(화체설)가 체계화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카톨릭교회의 성만찬(화체설)을 강하게 부정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루터를 들 수가 있는데 마르틴 루터는 1519년 시편 강해에서 그리스도의 원형이란 개념으로 성만찬의 상징적 의미를 가르쳤으나, 참된 그리스도의 몸의 성만찬과 형제의 사귐에 관한 설교에서는 화체설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1502년에는 종교개혁 원리에 관한 새 논문 중의 하나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화체설을 반대하고 어거스틴이 신앙의 식사를 살게 한다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물질이 있는 곳에 현실로 임재 한다는 공재설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루터의 공재설(Consubstantion)은 예수님의 전 인격으로서의 몸과 피는 그 요소들 속에 그 요소들과 함께, 그 요소들 밑에 임재 한다고 주장합니다. 곧 루터가 주장한 공재설은 신부나 목사가 성찬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나면 그 떡과 포도주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쯔빙글리는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순한 희생의 기념의 표시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동을 회상케 할 뿐이라고 주장하여 기념설 또는 상징설(Symbolism)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쯔빙글리에 의하면 성만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기념하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칼빈의 견해가 있는데 칼빈은 성만찬이 인간적인 것으로만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약속 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정된다고 말씀을 중요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에 믿음으로 참여하면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령한 은혜가 임한다는 영적 임재설(Spiritual Presence)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성만찬에 대하여 각기 주장하는 바가 다릅니다. 여기에 대해서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은 그리스도의살과 우리 사람의 영혼을 혼돈 하는 것이라고 하여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칼빈은 루터의 공재설(편재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이 세상의 물 질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잘못된 학설이라고 비판을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인 쯔빙글리와 칼빈은 성찬에 대해서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쯔빙글리는 성만찬을 회상과 고백의 표적이라고 보고 근본적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하였고, 칼빈은 성만찬이 가시적 상징물의 빈표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진짜 본질을 내포하는 영적실재를 표시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쯔빙글리의 단순한 기념적 행위로서 성찬에 참여 할 것이 아니라 믿음과 감사함으로 성만찬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즙을 마실 때에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참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에 참여함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